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반론 ==== 유비를 손권이나 주유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한다는 게 조금 사실과 다르다 여겨지긴 한다. 손권 역시 유비를 끝내 제어 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주유전. 또, 손권의 지배권이라는 게, 주유-정보를 필두로 한 회남 출신의 군대를 기반으로 강동사족들을 통제하는 형태기 때문에, 강동사족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시점에서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너무 이르다. 또한 유비가 커진 건 형북에서 조인과 1년넘께 대치하느라 형남을 유비가 먹어버린 게 컸고, 유비가 커졌는데 유비세력과 다투는 건 북방의 조조가 있는데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조조가 실제 군사원정까지 보낼 능력이 209,210년에 없었더라도 손권이 장희의 1천 명을 4만 명 뻥튀기로 적은 서신 하나에 속은 것을 보면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 조조가 실제로 초군에서 합비까지 209년 3월부터 12월까지 실제론 방어목적이라었다 하더라도 군대를 움직인 점 등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유비와 손권의 세력차이가 형남 4군+공안+여강의 수만명 항복까지 받고 자리보전 할 명분이 확고 한 유비의 세력을 고려시 단기간에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등이 손권이 유비를 경계하게 할 요인으로 있었다. 또 합비에서의 대 실패, 남군공방전에서의 손실 구강현, 당도현 반란도 적벽대전 종료 이후에 진압해야 했던점, 입촉 시도 역시 결국 공동작전으로 계획해야 했어야 했으며 유비의 동의 없이 단독 행동을 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해진다. 유비가 굽신대는 이유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남군대여를 통해 유비군의 세력확대 및 손권과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손권이 유비와 세력 차이가 나더라도 이를 쉽게 제압할 입장이 아니었다. 주유전의 손권이 생각한 끝까지 유비를 제압하지 못할거라는 인식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또 노숙전을 보면 노숙은 손권에게 말할 때 유비에 대해 '(우리의) 당파'라고 칭하면서 이를 늘려야 한다고 봤지 유비를 부하 뉘앙스로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손권과 유비의 동맹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준다기보단 일단 힘의 우위가 손권에게 있는 이상 결혼동맹 등을 통해 유비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확고한 아군인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사리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손권이 유비를 통제하는 것은 유비를 위협하는 손부인의 군사를 유비 측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감지되지 않고 유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입촉과 천하 삼분을 완료한다. 이런 유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선 손권의 입장에선 주유의 힘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주유 견제론을 수용하자면 그것은 일단 유비를 손권이 제거할 명분이 없고 유기를 앞세워 형주를 점령하는 유비를 강대한 조조가 있는 상태에서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손권이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주유나 견제하자는 심리로 유비를 좀 더 밀어주었다가 맞을 것이다. 유비 역시 세력비에서 밀리는게 사실이었으므로 납작 엎드려서 손권에게 기면서 세력을 키울 때까지 명분을 주지 않으며 독니를 숨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결국 손권이 유비에 비하면 세력비가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손권-노숙이 조조와 대치하는 유비에 대해 입촉 상황을 이용해서 마구 흔드는 것이라고만 봐도 충분하다. 그렇게 손가락 튕기면서 계산하며 유비를 남군까지 떼주면서 키워주었고, 이 과정에서 손권은 유비를 자신의 사냥개로 시험해 볼 수 있는지 실험해 봤다고 봐도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손권 본인은 호구가 되긴했지만. 또 강표전만 살펴 보자면, >劉備之自京還也,權乘飛雲大船,與張昭、秦松、魯肅等十餘人共追送之,大宴會敘別。昭、肅等先出,權獨與備留語,因言次,歎瑜曰:「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顧其器量廣大,恐不久為人臣耳。」 >유비가 경에서 돌아가게 되매 손권은 비운대선에 타고 장소, 진송, 노숙 등 10여명과 함께 그를 따라 전송하며 대연회를 열었다. 장소, 노숙 등이 먼저 가자 손권 홀로 유비와 함께 남아 얘기를 나눴는데 유비는 얘기를 하다가 주유를 찬탄하며 말했다. "공근의 문무주략은 만인의 영걸이라, 그 기량이 광대함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까가 두려울 뿐이오." >瑜之破魏軍也,曹公曰:「孤不羞走。」 >주유가 위군을 깨뜨리자 조공이 말했다. "주유에게 패했으니 고는 (패하여) 달아남이 부끄럽지 않구려." >後書與權曰:「赤壁之役,值有疾病,孤燒船自退,橫使周瑜虛獲此名。」 >뒤에 손권에게 편지하여 말했다. "적벽싸움에서는 마침 질병이 있어 고가 배를 태우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주유가 이렇게 이름을 헛되이 얻게 할 줄이야." > >'''瑜威聲遠著,故曹公、劉備咸欲疑譖之。 ''' >'''주유의 위엄과 명성이 멀리 떨친 까닭에 조공, 유비가 모두 그를 의심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당시 오나라 역사가들은 오히려 조조와 유비가 먼저 손권과 주유를 이간시키고자 했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과 주유의 관계는 외부에서 이간시키려고 할 정도로 오히려 탄탄했다는 얘기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